덕질은 나의 힘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주빈 메타와 예브게니 키신, 그리고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떠돌이 클덕 2019. 3. 14. 20:58

2018.11.30.(금) 20:00~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예브게니 키신의 협연 티켓을 예매해두고 손꼽아 기다리는 중이었다.

문자가 하나 오길래 대수롭지 않게 봤더니

'지휘자 변경공지, 마리스 얀손스&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찰나였지만 온갖 감정이 스쳤다.

놀람이 좌절을 거쳐 분노로 바뀔 때쯤 다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주빈 메타로 변경되었습니다.'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정 그렇다면야 뭐...'하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상임 지휘자가 아닌 것은 아쉽긴 했지만, 얀손스를 대신할 지휘자로 주빈 메타를 섭외했다는데야 더 이상의 불평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공연 시작 전 포디움에 놓여있는 회전의자를 보자 걱정이 되었다. 마에스트로 메타의 나이가 나이인 만큼 건강이 많이 안 좋은 건 아닐까, 이번 공연 지휘는 괜찮은 걸까. 온갖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가는 중 협연자 키신과 마에스트로 메타가 무대에 올랐다.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나온 주빈 메타는 걷는 것이 좀 힘겨워 보이긴 했지만, 포디움 위에 앉아 지휘봉을 든 그의 모습은 여전히 위풍당당했다.

키신의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1번이라니! 당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테크니션이었던 리스트의 당당함과 자신감이 담긴 곡을 철두철미한 연습벌레인 키신이 연주한다니! 이런 설레는 조합이 또 있을까.

내가 아는 것 보다 살짝 느린 템포로 연주가 시작되었다. 예브게니 키신의 연주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완벽한 테크닉을 바탕으로 한 정확하지만 영롱한 터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선율은 한 달 전과 다를 바 없었다. 조금 느리다 싶었던 연주는 3악장에 들어서자 몰아치기 시작했다. 비록 사운드가 고르게 들리는 자리가 아니어서 3악장 피날레 부분에서의 피아노 연주를 제대로 못 듣긴 했지만 그 어떤 음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맑고 곱게 빚어 내는 키신의 연주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파워풀한 서포트는 큰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연주를 듣고 있자니 희열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였다. 앵콜은 차이코프스키의 명상곡, OP.72 No.5, 드뷔시 어린이 차지 중 골리워그의 케이크워크였다. 키신이 드뷔시의 곡을 연주하자 관객 뿐만 아니라 마에스트로 메타 또한 즐거워하며 감상했다.

2부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였다. 이전에 다른 오케스트라가 이 곡을 연주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의 연주는 '영웅의 생애'가 아닌 '영웅의 방황' 또는 '졸부의 생애' 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이번에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마에스트로 메타가 제대로 된 '영웅의 생애'를 들려주었다.

그들의 연주를 듣는 동안, 실제로 영웅의 일대기를 함께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영웅의 위풍당당한 등장에 감탄하고, 그를 시기하는 적들을 얄미워 했다가, 아름다운 사랑에 찔끔 눈물도 흘리고, 중무장을 한 채 영웅과 함께 전장을 누비다가, 다시 군중 속에 섞여 전투에서 승리한 영웅에게 갈채를 보내기도 했다. 피날레가 특히 압권이었는데 웅대했던 그의 생이 끝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감동과 슬픔이 교차되는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전에 들었던 연주 역시 무대를 가득 채울 정도의 인원을 동원한 대편성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밋밋하여 방향을 잃은 느낌이었다면, 메타의 영웅의 생애는 영웅이 겪고 있는 일을 눈 앞에서 보여주는 듯 했다. 상임지휘자인 얀손스의 부재를 상쇄시켜 줄 만한, 곡이 가진 스토리를 생생하고도 웅장하게 풀어낸 호연이었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단원들의 실력 또한 대단했는데, 특히 오보에 주자가 발군이었다. 그 외에도 현은 물론이거니와 금관, 목관 할 것 없이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완벽한 연주를 보여주었다.

앵콜은 두 곡을 했는데, 드보르작 슬라브 무곡과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Explosions polka였다. 두번째 앵콜곡을 설명하는 마에스트로의 멘트 중 힘주어 말한 '팡파레!'부분만 겨우 알아듣고는 어리둥절해 있는데, 연주의 마지막 부분에서 '펑!'하는 소리와 함께 폭죽(?)이 터지며 무수히 많은 금박이 무대 위로 흩날렸다. 예상치 못한 -사실 그냥 못 알아들었을 뿐이다- 이벤트로 마지막까지 즐거운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