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은 나의 힘

대구시향과 마에스트로 코바체프가 전하는 메리 크리스마스

떠돌이 클덕 2019. 3. 13. 20:21

2017.12.15.(금) 17:30~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

대구시향의 440회 정기연주회에 다녀왔다.

프로그램에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가 있길래 별 생각 없이 예매해 뒀던 것인데,

공연 4~5시간 전 쯤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문자가 왔다.

내용은 '공연 후 지휘자 사인회 예정'

그것을 본 나는 약간 의아했다. 종종 시향공연에 가곤 했지만 마에스트로 코바체프 사인회는 여태 한 번도 못 봤었기 때문이다.

'대구시향에서 이번에 음반이라도 발매하는걸까'하는 이런저런 추측을 해가며 공연장으로 향했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솔리스트는 로열콘세르트허바우 악장인 'Vesko Eschkenazy'. 그는 대구시향 상임지휘자인 마에스트로 코바체프와 같은 불가리아 출신으로 '과르네리 델 제수' 바이올린을 사용한다고 한다.

내가 바이올린 종류에 따른 음색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클래식에 정통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 날 바이올린 협주곡을 감상하는 내내 오케스트라와 솔리스트 음색의 차이가 확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구시향의 경우 '공연장에 와주었으니 라이브 음악을 들려주마!'하는 기세의 선명하고 쨍한 음색이었다고 하면, 에슈케나지의 바이올린은 아련하면서 부드러운,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어딘가 저 먼 곳에서 연주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차이가 바이올린에서 기인하는지 연주자에게서 기인하는지 아니면 그 둘 다 영향이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음색의 차이 때문에 바이올린 협주곡은 솔리스트의 연주와 오케스트라의 서포트 사이에 다소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바이올리니스트의 기량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라 앙코르 곡인 'Ochi Chernye(Dark Eyes) Variations' -러시아 민요 '검은 눈동자(집시송)' 변주곡으로 에슈케나지가 편곡했다고 한다-는 만족스러웠고 다른 관객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공연 시작 후 첫 브라보도 협주곡이 아닌 앙코르곡에서 나왔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영웅의 생애'는 무대가 꽉 차는 대편성이었다. 호른 8대를 포함한 관악파트에 하프도 2대나 있었고 현악주자들도 무대에 단을 만들어 앉아야 할 정도로 꽉 들어차 있었다. 마에스트로 코바체프는 이러한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곡목에 걸맞는 웅장한 사운드를 만들어 내고자 열정을 담아 지휘했다.

Julian Kovatchev는 2014년 4월에 대구시향 상임지휘자로 부임하여 지금까지 경력을 이어오고 있는데, 한 지인은 그가 시향을 매우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고 그가 온 이후로 시향공연이 인기가 더 좋아졌다고 평했다. 나는 클래식을 좋아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실여부를 판단하기는 힘들지만 2018년 상반기 대구시향 정기공연 티켓이 판매된 정도를 보면 그 지인의 평가가 어느 정도 맞는 것도 같다.

공연이 끝난 뒤에는 공지했던 대로 사인회가 열렸다.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이 시향 상임지휘자의 사인을 받고자 줄지어 섰다. 내 앞에 사인을 받으시던 나이가 지긋하신 한 팬분은 마에스트로 코바체프에게 서툰 영어로나마 자신이 얼마나 그의 지휘를 좋아하는지 전달하셨고 이에 마에스트로는 환한 미소로 화답했는데,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나도 흐뭇해졌다. 사인을 받기 위한 종이가 따로 준비되어 있었지만 나는 처음 문자를 봤을 때 마음먹은대로 평소 가지고 다니는 덕질용 수첩에 받았다. 내가 새하얀 페이지를 내밀자 에슈케나지는 살짝 당황한 듯 여기하면 되냐고 되물었고 마에스트로 코바체프도 수첩을 받아들고는 어디해야 할지 조금 망설이는 것 같더니 이윽고 '이거 성경책이야? 뭔지 잘 모르겠네..'하며 에슈케나지 사인 아래에 '붐!'이라는 효과음을 스스로 넣어가면 슥슥 사인을 해주셨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사인이 외롭지 않게 해드렸어요.. 재미있는 콜라주 놀이!)

 

 

나는 이 사인회의 의미를 사인을 받고 난 직후 알 수 있었다. 연주회 이후 사인까지 받았는데 바로 앞에서 직원분이 뭘 또 건네 주셨다.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메리 크리스마스'

 
(대구시향의 크리스마스 선물)

사인회를 포함하여 이번 공연은 대구시향과 마에스트로 코바체프가 전하는 즐겁고 따뜻한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