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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7.(금) 20:00~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갑자기 떨어진 기온 탓에 예술의 전당으로 향하는 길은 무척 혹독했다. 특히 서울에 도착하는 것이 생각보다 많이 지체되어, 자칫하면 늦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지하철역에서부터 공연장까지 뛰다시피 해서 더욱 그랬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시간 내에 도착하긴 했지만, 찬 바람을 가르며 질주(?)한 탓에 공연 시작 전부터 이미 기진맥진해 있었다. 땀에 젖은 패딩코트를 벗고 꽁꽁 언 뺨을 두 손으로 녹이며 주위를 둘러보니 1층에 빈자리가 제법 보였다. 특정 구역이 몽땅 비어 있는 것은 아마 초대석이었겠지만 드문드문 보이는 빈 자리는 갑자기 지휘자가 변경되어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비록 주빈 메타가 멋지게 빈 자리를 메우긴 했지만,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에 이은 두 번째 지휘자 변경이라 사실 나도 기분이 썩 유쾌하진 못했다. 처음으로 정명훈 마에스트로의 지휘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가 컸던 탓에 더 그랬으리라. 그러나 안네 소피 무터와 서울시향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서 표를 취소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옳은 것이었다.
어깨가 드러나는 디자인의, 에메랄드 빛을 띄는 얇은 재질의 드레스를 입은 안네 소피 무터는 생각보다 느린 템포로 연주를 시작했지만 마지막에는 마치 폭풍이 휘몰아치듯 격렬하게 끝을 맺었다. 관객의 환호에 환한 얼굴로 답한 그녀는 두 곡의 앵콜을 모두 바흐의 곡-지그, 사라방드- 으로 연주하고는 깔끔하게 무대를 마무리 했다.
사실 지휘자가 변경되고 난 후부터 비창에는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이라고 생각하며, 2부는 차이코프스키의 명곡을 실연으로 듣는 것에 만족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시향의 흔들림 없는 연주를 듣고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이 날의 연주에는 구멍이 없었다. 1악장에서 트럼펫 연주를 듣던 나는 경악했다. 국내외 오케스트라가 관악파트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몇 번 목도했기에 '저게 된다고?' 싶은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서울시향 연주자-특히 관악주자-들은 탄탄하고 안정된 기량을 선보였다. 지휘자의 손짓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금관, 목관 할 것 없이 저마다 자기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역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오케스트라다웠다.
비창은 들을 때 마다 힘이 많이 든다. 거대한 체념이 지배하는 가운데 아름답고도 날카로운 애수가 심장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은 1악장 때문인지, 아니면 마치 조울증을 연상케 하는 2악장에서의 잦은 분위기 전환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지도 못한 채 그저 격렬하고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듯한 3악장-그리고 그 후에 나올 박수에 대한 염려-이 이유일수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저항 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검고, 깊고, 고요한 물 속으로 끝없이 침잠해 가는 것 같은 4악장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서울시향의 연주는 매 악장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했다. 무게감 있고도 아름다운 현악 선율에 1악장에서는 눈물을 글썽일 수 밖에 없었고, 마치 내일은 없는 양, 온 힘을 다해 격렬하게 연주해 낸 3악장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3악장의 끝에 아니나 다를까 제법 큰 박수가 나왔는데, 심정 상으로는 나도 같이 치고 싶을 정도였다. 반면 4악장 마지막에서는 그 끝없이 가라 앉는 것 같은 느낌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곡이 끝났음에도 박수를 치는 것이 힘들었다. 그만큼 훌륭한 연주였다.
비용이 부담이 되어 합창석에 앉은 탓에 사운드가 너무 호른 친화적(?)이었던 것이 못내 아쉽다. 다음 번엔 좀 더 조화롭게 들을 수 있는 자리에 앉아서 서울시향의 연주를 제대로 한 번 감상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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